2013년 7월 8일 월요일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7) - 배울 학(學), 익힐 습(習), 깨달을 각(覺)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7)
- 배울 학(學), 익힐 습(習), 깨달을 각(覺)

갑골문(甲骨文)의 배울 학(學)자를 보면 초기에 'X'자 밑에 영어 'U'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것을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한자에는 'X'자가 두 개라 가로 그을 효(爻)처럼 보이는데 원래는 'X'자가 한 개였습니다. 하지만 한 개든 두 개든 그 모양은 모두 숫자를 셀 때 쓰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효(數爻)라는 단어에 가로 그을 효(爻)를 씁니다. 고대의 ‘배움’은 어쩌면 간단한 셈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X'자 밑의 뒤집어진 영어 'U'자는 공부하는 작은 방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갑골문에서 금문(金文)으로 넘어오면서 셈 막대기 좌우로 손 그림이 추가됩니다. 아마 하나는 선생님의 손, 다른 한쪽은 학생의 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둘 다 선생님의 손인 것도 같습니다. 나중에 변형된 글자에서는 공부하는 교실처럼 보이는 곳 중앙에 어린아이의 그림이 추가되었습니다. 배움(學)이라는 것은 철저히 선생님에게서부터 학생으로 전수되는 것입니다. 손에서 손으로 어떤 물건이 전달되는 것처럼 배움을 통해 스승의 앎이 제자로 옮겨 옵니다.

일반적으로 학생이 스승과 늘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배움의 시간이 지나가면 학생은 스승이 있는 자리를 떠나 배운 것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러한 복습의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됩니다. 반복을 통해 학생은 배운 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익히게(習)됩니다.
갑골문의 익힐 습(習)자는 위에 새의 날개가 아래에 새의 둥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 둥지 안팎을 자유롭게 다니기 위해 날개를 단련합니다. 반복적으로 퍼덕입니다. 처음에는 큰 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만 먹고 둥지에 머물지만, 곧 자라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배울 학(學)이 선생님께 배우는 것이라면 익힐 습(習)은 반복을 통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익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달을 각(覺)의 윗부분에도 배울 학(學)자가 있습니다. 다만 아랫부분에 어린아이를 뜻하는 자(子)자 대신에 볼 견(見)자가 있습니다. 볼 견(見)자는 사람의 몸에서 눈 한쪽을 크게 그려 놓아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글자입니다. 깨달을 각(覺)자에 대하여 설문해자(說文解字)는 '깨어나다'라는 뜻으로 적고 있습니다. 깨어나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에게 배워서 몰랐던 사실에 눈을 뜬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것, 깨달음(覺)입니다.

널리 알려진 글귀이지만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에 보면 '배우고 적절한 시기에 익히니 (子曰學而時習之(자왈학이시습지))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不亦說乎(불역열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왕 이 부분을 거론했으니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원문을 제 말로 번역해보았습니다.

학(學)이란 '본받는다(效)'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이 선하지만 먼저 깨닫는(覺) 사람이 있고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늦은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는 대로 본받아야만 왜 인간을 선하다고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선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습(習)이라는 것은 새가 반복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움을 멈추지 않고 새가 날갯짓을 쉬지 않는 것처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배움(學)은 익힘(習)으로 나아가고 그 가운데 깨달음(覺)이 있습니다. 먼저 깨닫지(先覺) 못 한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학생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학생들이 저를 선생,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저는 많은 깨달음도 없고 먼저 깨달음을 얻은 분을 스승으로 둔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가 스스로 깨달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책을 좋아하여 가까이하고 그 책이 저의 스승이 되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도 있어 중국 간체자(簡體字)로 배울 학(学)자를 써주고 글자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청출어람(青出於藍)이라고 선생보다 훨씬 총명하고 기지 넘치는 학생이 대뜸 "선생님! 이것은 책상을 가운데 두고 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이네요! 그리고 책상 위에 책이 세 권 놓여 있어요." 저는 잠시 글자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을 잠시 멈추고 나름 그럴듯한 학생의 설명에 미소로 화답하였습니다. 어쩌면 저의 미천한 배움이라는 것은 거반 책상을 혼자 마주하고 그 위에 놓인 책을 스승으로 삼은 배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에게 가르쳐주신 은사(恩師)가 왜 한 분도 없으시겠습니까만 제가 큰 깨달음(覺)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책-선생님(書師)을 통해서니 제가 그 어린 학생의 해석에 금방 토를 달지 못하고 감탄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학생 여러분! 배움의 핵심이 깨달음(覺)이라면 좋은 깨달음과 바른 깨달음을 주는 책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스승이 되어 삶의 길을 지도할 것입니다. 특히 옛 어른들의 고전(古典)을 가까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짧은 시간 동안 유행을 타고 금방 잊힐 책과는 비교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중국어와 한자를 배우는 사람도 많지만,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시절에는 중국어를 가르치는 곳이 한두 곳밖에 없었고 한문이나 서예를 배우는 학생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려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저는 한문이 잔뜩 적혀 있는 고전을 헌책방에서 헐 값에 많이 사서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양의 고전도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만 서양의 수백 년 역사와 동양의 수천 년 역사를 비교해볼 때 그 깊이와 넓이를 함께 놓고 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한국인은 동양인입니다. 금방 사라질 감각적인 서구의 문학보다는 더 많은 동양의 고전을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낡은 책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오래전 먼저 깨달은 분들이 적어 놓은 책들이 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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