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6)
- 늙을 노(老), 살필 고(考), 효도 효(孝), 가르칠 교(教)
" 어른의 바른 훈책 아래 자라지 못한 불효자인 나는
선생이 되었으나 스스로 가르침에 확신이 없어 이곳저곳 살피기만 할 뿐
명확한 삶의 교훈을 전수하기 어렵다!"
원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늙을 노(老)자와 살필 고(考)자가 같은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중국인들은 이 두 글자를 혼용하였습니다. 그 뜻인즉슨, 머리가 긴(長)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림 참조) 공자께서 효경(孝經)에서 신체와 터럭과 살갗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身體髮膚受之父母) 당시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평생 자르지 않아 노년이 되면 긴 머리털을 치렁치렁 늘어트리게 되었습니다. 연장자(年長者)자 함은 나이뿐 아니라 머리털이 긴 사람을 뜻하는 것이죠.
늙을 노(老)자와 살필 고(考)자의 자원(字原)이 같다고 하여 둘의 의미를 연결해서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깊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설명하는 분의 설명도 들어본 기억이 납니다.
혹자는 옛날 중국인이 70세의 사람을 아주 연로(年老)한 노인으로 칭한 것을 두고 늙을 노(老)자의 윗부분이 머리가 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 7과 10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시황의 소전체(小篆體)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영락없이 긴 머리를 그려놓은 것처럼만 보입니다. 노인은 신체의 기능이 쇠하고 특히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가장 오래된 갑골문의 늙을 노(老)자를 보면 눈 한쪽 아래 구부정한 몸을 붙여놓은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지팡이를 덧붙이게 되는데 이때의 갑골문에 그려놓은 눈은 가운뎃점이 없어서 흐려진 시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중에 금문(金文)과 소전체로 넘어오면서 눈 모양은 사라지고 긴 머리 그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숫자 70이라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신체의 일부분, 눈과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효도 효(孝)자는 머리카락이 긴 노인을 의미하는 기호 아래에 지팡이 대신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지팡이가 아닌 어린아이가 연로한 사람을 부축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노인이 어린아이에게 업혀있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런 해설도 크게 그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면 글자 아래 그림을 어린아이보다는 아들이나 자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손자같은 아이에게 업어달라고 하는 노인은 없으니까요.
금문(金文)의 효도 효(孝)에서 보이는 아들 자(子)는 머리가 둥그렇게 크고 다리는 하나밖에 없는 모습인데 이는 아기의 다리가 천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아기를 강보(襁褓)에 싸면 아기의 다리는 안에 가려 보이지 않고 두 팔은 밖으로 나와 있게 됩니다. 어르신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고 큰 힘이 되지 않지만, 곁에서 재롱을 부리고 거동하시는데 다소 부축하게 해드리면 어르신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르칠 교(教)자의 왼쪽(左邊旁)에 효도 효(孝)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갑골문으로 보는 가르칠 교(教)자의 왼쪽 상단에는 머리가 긴 노인의 그림이 없고 오히려 가로 그을 효(爻)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효(爻)자는 '사귀다', '본받다'는 의미도 가진 글자인데, 어떤 분은 이것을 유학(儒學)의 삼경(三經)중에 하나인 역경(易經, 주역(周易))의 육효(六爻: 괘(卦)를 이룬 가로획)와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또 어떻게 보면 이 글자는 '날카로운 칼 따위로 벤다'는 의미의 예(乂)자를 위 아래 거듭 적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역경의 효를 뜻한다면 그 아래 아동은 역경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만약 날카로운 농기구나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면 어린아이는 농사 방법이나 사냥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가르칠 교(教)의 왼쪽 상단 부분은 원래 노인을 의미하지 않았고 나중에 효도 효(孝)자와 같게 바뀌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분명히 어린 학생의 '교과서' 혹은 '배울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어서 가르칠 교(教)자의 오른쪽 부분을 보니 칠 복(攴)입니다. 손으로 막대기 같은 것을 쥐고 가볍게 때리는 모양입니다. 아마 공부를 하는 아이를 곁에 두고 열중하지 않거나 졸면 회초리를 때리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도록 회초리를 드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습관입니다. 현대에 와서 부모의 과도한 체벌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제가 세 자녀를 키워보니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그것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자녀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차원에서 다소의 체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을 적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봅니다. 더 길어야 할 머리카락이 짧다 못해 성기고 백발도 듬성듬성 나 있어 볼품이 없습니다. 분주하게 일하기도 바쁜 젊은 사람이 벌써 노년기에 접어 든 것처럼 이유없이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돌아보니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했다는 것과 자식 낳아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30세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무거운 가장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시고 집을 떠나 본인의 길을 걸어가셨던 어머니지만 그 곁에 손자 손녀 놓아드려 부축 한 번 해드리지 못했습니다(不孝). 또한, 곁에서 따끔한 채찍질(攴)이 없다고 방종하여 더욱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지 않았고 이젠 어설픈 실력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教) 소란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효(不孝)한 자로 누군가를 가르칠(教) 자신감도 없는 저는 흐르는 시간 가운데 늙어가는(老) 거울 속의 자신을 느끼며 이곳저곳 하릴없이 눈치만 보면서(考)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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