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9) - 복 복(福), 간직할 부(福)

: 신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든 경건하고 여유로운 모습이 복(福)이다.

최근 한 개신교인이 한자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기를 복 복(福) 하늘(一)로부터 삼위일체(川)가 내리신 것이 복이며 사람의 입(一口)이 먹을 것으로 흡족하게 채워지며 에덴동산(田)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을 내린 한국인이나 중국인 개신교인들 스스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았던 시기에 창세기 내용을 한문으로 풀이한 것"이라고 이러한 해석이 시대적으로 엉터리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격다짐으로 한자의 창시자가 이미 고대로부터 전래된 창세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하더군요. 확실한 근거도 없음에도 개신교적인 강론이나 주장에 이런 '미신적인 해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개신교가 "꿩 잡는 게 매다"식의 목적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복 복(福)자가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역시 갑골문(甲骨文)입니다. 갑골문의 글자 모양을 보면 금방 그것이 다신(多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손에 든 잔(盞)을 묘사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술을 바치면서 자신에게 풍족함과 평안함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모습에서 이 글자가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 글자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상이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삼위일체 개념이 상당히 후대(325~451년)에 정립된 것이라고 볼 때, 고대에 만들어진 글자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들어있다니, 역사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금문(金文)》에 와서 복(福)의 모양은 왼쪽에 제사를 의미하는 볼 시(示)와 오른쪽에 술병(酉 닭 유, 술을 담는 그릇을 뜻하기도 함)을 묘사한 모양이 뚜렷해집니다. 술잔 혹은 술병을 든 두 손은 보이지 않습니다.

《설문해자(说文解字)》도 갑골문으로부터의 이 전통을 따라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받는 복(福)을 '신의 돌보심'이라고 해설하는 것을 볼 때, 이 글자가 종교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등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자에서 나타나는 '제사를 드린 대가로 받는 것이 복이다'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뒤집어서, '대가를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보다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나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입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이 최소한 엉터리로 한자의 유래를 꿰맞추어 삼위일체 교리가 확실하고 대단한 교리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다신에게 술을 바친 것, 그것도 좋은 술을 바친 것은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그 복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좋은 술을 빚어 신에게 바쳤다면 그것이야말로 절실한 기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자의 기도든, 절박한 빈자(貧者)의 기도이든지 두 손을 공손히 바쳐 올려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경건하게 보입니다. 넉넉한 형편에 있음에도 겸손하게 기도를 올립니다. 절박한 상황이지만 신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옷깃을 여민채 술을 올립니다. 저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알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에서 부자들의 기도는 신 앞에서조차 다소 거만한 듯 보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 찌든 가난을 이유로 기본적인 위신도 챙기지 못한 채 잠시 기도할 여유조차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복은 과연 신이 우리에게 치하(賜下)하는 것 맞습니까? 아니면 부자가 겸손하게 두 손을 반듯이 올리고 하는 경건한 기도와 빈자가 바쁘고 쪼들린 삶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추어 드리는 예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삶의 여유와 쉼' 자체는 아닐까요? 복을 갖춤(備)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이 혹시 '마음 갖춤' 혹은 '마음가짐'의 뜻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기도하는 그 마음이 복(福)을 가져다준다. 아니,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죠.

2013년 7월 8일 월요일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1)] - 나 아(我)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1)] 
- 나 아(我)

"나는 스스로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으며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서 있다." 

원래 나 아(我)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서유기 西游记》에 나오는 저팔계가 들고 다니는 쇠스랑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양입니다. 농기구처럼 보이는 것은 고대에 보편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던 일종 창을 의미합니다. 이 무기는 중국의 상(商)대와 전국시대에 가장 많이 쓰였는데 진(秦)대 이후에 점차 사라졌습니다. 전쟁이 나면 이빨이 세 개 나 있는 날카로운 무기를 위로부터 내리찍어서 인명을 살상했던 것이죠. 사실, 중국에서 이 나 아(我)자가 '나'를 지칭하기 전에는 우리가 생각할 때 임금님이 스스로 칭할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짐(朕)이나 과인(寡人)과 같은 단어들을 누구나 사용했습니다. 짐(朕)은 진시황 때 이후에, 또 과인(寡人)은 당(唐)대 이후에 오직 임금만을 칭하는 단어로 굳어졌죠.
이처럼 무기는 고대로부터 '나', '개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자기 방어 수단으로, 생명을 보전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로서 무기는 곧 나 자신이요, 나는 바로 무기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방어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외부 공격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방어하는 반사적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 개인이 생명과 안위를 보전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갑골문의 나 아(我)자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사람은 누구나 하나씩 무기를 가지고 서 있습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싸울 태세를 하고 있습니다. 적을 내리찍어버릴 기세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맹렬한 전쟁을 하며 살고 있죠. 비록 이런 현실이 매우 애석하기는 하지만, 이런 현실을 아주 부정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부언] 이 글자에서 왼쪽의 삼지창처럼 생긴 부분을 사람의 손으로 오른쪽의 막대기처럼 생긴 것을 창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4) - 옷 의(衣), 벌레 충(蟲, 虫)과 긴 뱀 사(蛇)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4) - 옷 의(衣), 벌레 충(蟲, 虫)과 긴 뱀 사(蛇)

"파충류(爬蟲類)인 뱀에게서 배울 점은 
성장하기 위해서 
외식적이고 사치스러우며 화려한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가장 오랜 자전(字典)이며 중국 후한(後漢)의 학자 허신(許愼, 30 ~ 124)이 저술한 책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옷 의(衣)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비교적 간단한 설명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옷은 몸을 가리는 데 쓰이는 것으로서 윗옷을 의(衣), 아래옷을 상(裳)이라고 한다."

갑골문(甲骨文:기원전 1200년~1050년 상(商)말기 문자)의 해당 글자를 보고 일반적으로 윗부분이 옷의 목깃을 의미하며 아랫부분은 옷을 입은 뒤 가운데로 모아 여미는 옷의 양 섶이라고 해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무리 봐도 왜 목깃을 'V'형으로 그리지 않고 'ㅅ'형으로 그려 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전체를 뭉뚱그려 고대의 의복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혹자는 옷 의(衣)자를 벌레 충(蟲,虫)자와 연관 짓습니다. 벌레 충(虫)자는 원래 '뱀을 포함한 땅에 기는 어떤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실제로 지금까지도 긴 뱀 사(蛇)자 왼쪽 부분(左邊旁)에 벌레 충(虫)자가 남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의 다를 타(它)는 '뱀 사'로도 읽히는데 이 역시 '사람 이외의 어떤 것', '벌레','뱀'의 의미를 가진 글자입니다. 갑골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벌레 충(虫)과 옷 의(衣)가 상당히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첨부 그림 참조) 고대에 벌레와 동류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파충류(爬蟲類)인 뱀의 윗부분에서 무엇이 잘려 떨어져 나간 것을 옷 의(衣)자로 형상화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뱀은 껍질을 벗는(脫皮) 변온동물(變溫動物)입니다. 그리고 뱀이 벗어놓은 껍질을 '새끼 용의 옷' - 용자의(龍仔衣)라고 하는데 이것을 중국 의학(中醫)에서는 해독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고대 중국인들이 고대 중국인들이 뱀이 벗어 놓은 허물을 보고 몸에 덮어 수치를 가리는 옷의 의미를 연상하여 옷 의(衣)자를 만들었다고 추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어떤 패션쇼에서 자칫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뱀 가죽에 색깔을 입혀 만든 의상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뱀이 가진 부정적인 의미 때문에 많이 팔릴 것 같지 않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남들과 차별화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할 것 같기도 합니다.

뱀은 성장과 성숙을 위해 껍질을 벗는데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치장하기 위해서 옷이라는 '껍질'을 많이 끼어 입고 있으니 뱀과 사람 누가 더 솔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과도한 자기 수식과 치장이 난무하는 요즘, 뱀이 허물을 벗듯이 껍질들을 다소 벗어 버리고 진솔한 자신을 표현하므로 더욱 성숙한 우리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뱀이 벗어 놓은 껍질이 해독약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우리가 벗어 놓은 것들이 삶을 정화(淨化)하는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2)] - 사람 인(人)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2)] 
- 사람 인(人)

"사람이란 존재는 늘 삶의 무게에 눌려 
팔을 땅으로 축 늘어트리고 있는 
지쳐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사람 인(人)자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속설 및 나름대로 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인(人)자가 남자에게 여자가 기대고 있는 모습이라거나 두 사람이 동등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갑골문을 보면 이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양을 그려 놓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왼쪽에 짧게 늘어져 있는 선은 팔뚝을, 위로 뻗어 나온 것은 누가 봐도 머리이며, 왼쪽 아래로 신체, 즉 허리와 다리가 뻗어 있습니다. 문자의 사람은 곧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는 모양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줍니다. 이 모양은 필경 지체 높은 왕족의 모양같이 보이지는 않고 일반 평민이 열심히 일하거나 최소한 일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사람 인(人)자가 음양설의 하늘과 땅을 형상화한 것이라거나 두 사람이 의존하고 있는 모양을 의미한다는 말은 외롭게 혼자, 그것도 구부정한 자세를 한 사람이란 의미보다 뭔가 대단하고 아름답게 들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갑골문의 사람은 앉아 쉬지도 못한 채 조용히 혼자 서 있습니다.

사람의 삶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영면(永眠)에 이르기까지 끊임 없이 땀을 흘리며 일해야 합니다.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많은 스트레스가 우리로 비틀거리며 휘청거리게 합니다. 늘 어딘가 쉴 곳을 찾아 더듬거리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항상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 극히 짧았던 사람의 팔은 소전(小篆)체로 넘어오면서 상당히 길어져서 그것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됩니다. 그러다가 활체(活体; 楷体)에 와 드디어 가장 안정적인 모양을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족보행(二足步行)을 하는 사람의 모양과는 거리가 멀게 보입니다.

피곤한 일상을 살다가 잠시 짬을 내어 저의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신다면 사람 인(人)자에 관한 속설을 믿는 편이 낫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두 사람이 의지하고 있다는 해석이 혼자 외롭게, 그것도 땅에 팔을 늘어뜨리거나 엎드려 있다는 해설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들릴 것입니다. 사람은 필살 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땅에 손을 짚고 기어 다닙니다. 조금 더 자라서 직립보행을 하게 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허리가 점점 구부러지고 다시 자주 아기처럼 땅에 손을 짚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보자면 사람을 늘 꼿꼿하게 서서 이족보행을 하는 존재로만 이야기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아기와 노인을 제외하고 젊은 당신 역시 지금 삶에 지쳐 팔을 땅으로 축 늘어트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아니면 누워있다가 어쩔 수 없이 밀린 일 때문에 가까스로 일어나는 동작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당신을 고대 사람들이 여기 딱 그대로 글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3) - 허물 죄(罪,辠)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3) - 허물 죄(罪,辠)

"사회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죄인에 대한 합리적인 처벌 여부를 통해 가늠한다."

저는 개신교인입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한자와 성경의 내용을 연관 지어 강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사는 여러 가지 한자들을 재미있게 파자(破字)하여 성경의 내용을 함께 설명하는 식으로 많은 청중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는 허물 죄(罪)자에 대하여 머리 부분이 넉 사(四)자이며 네 가지, 혹은 여러 가지 죄악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머리 부분이 눈 목(目)자 이며, 성경 창세기 3장 6절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처럼 눈이 범죄의 통로라고 하면서 나름 그럴 듯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한자의 소전(小篆)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한자의 머리부분은 넉 사(四)자도 아니요, 눈 목(目)자도 아닌 그물 망(网)의 모양과 더 비슷합니다. 그러니 굳이 설명하려면 '도망치던 죄인이 걸린 그물' 운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또한 허물 죄(罪)자의 아랫부분에 아닐 비(非)자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은 이것이 나무 목(木), 즉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안에 만들어 놓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뜻한다고 하면서 죄(罪)란 바로 그 선악과(善恶果)를 둘로 쪼개듯이 망가트려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닐 비(非)자는 본래 새가 나는 모습을 본 떠 만든 날 비(飛)자와 관련이 있는 글자로 아래로 늘어트린 새의 날개가 서로 반대쪽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반대',' 반대쪽', '어긴다'는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합해서 보자면 '새의 날개가 그물에 걸렸다.'는 뜻으로 구성해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해설은 이 그물이 새를 잡는 그물이 아니고 물고기를 잡는 대나무망(竹網)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자를 연구하는 적지 않은 분들은 통전적으로 이 글자가 '그릇된 일(非)을 행한 사람을 포획한다(捕獲)'는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갑골문을 살펴볼 길 없고 오직 후대의 소전(小篆)체만 떠들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허물 죄(罪)자에 대한 여러가지 그럴 듯한 주장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이해가 공존하는 한자는 대개 상대적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자에 각자 나름대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이 글자에 대한 논의를 어느 정도 종결짓기 위해서 훨씬 더 옛날에는 허물 죄(罪)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문헌은 이 글자 대신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글자인 허물 죄(辠)자를 썼습니다. 허물 죄(辠)는 사람의 코 아래에 고대 형벌 도구인 매울 신(辛)자가 놓여 있는 글자입니다. 그것은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의 코를 베는 칼이었습니다. 나중에 '맵다','독하다','괴롭다'등의 의미의 유래도 코가 잘린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진나라 26대 왕인 혜문왕(秦惠文王)은 태자였을 때 법을 어겨 상앙이 스승의 코를 자르는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나중에 상앙을 거열(車裂: 흔히 죄수를 난도질해서 죽이는 능지처참(凌遲處斬)과 혼동 되는 형벌로 소나 말을 죄수의 사지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몰아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는 형벌)로 처형했습니다. 코를 베는 형벌을 의형(劓形)이라고 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처럼 잔인하게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 스승의 코가 잘린 일에 대해 혜문왕이 얼마나 분노했고 수치스럽게 여겼음을 미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한자 역사에 이 두 글자는 같은 의미와 용도로 병용(並用)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글자를 통해 범죄에 대한 고대 중국인의 개념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죄인은 죄를 짓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필경 그물에 걸리듯이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
죄인은 물고기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대나무 그물에 턱 걸리고 말 것입니다.
붙들리면 신체가 절단되는 것과 같이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

범죄는 부정적 사회활동이며 대인적 위해(危害)입니다. 사회의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 리더 집단은 이러한 범죄의 확산을 막으려고 체포망을 더욱 조밀하게 만들고 무서운 형벌을 통해 범죄자의 종국이 참담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주지시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계속 범죄와 범죄자와 직면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죄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인적인 범죄에 대해서 일정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인 대물 상해나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스스로 '나의 죄는 신이 용서했기 때문에 나는 더는 용서를 빌 대상도 없다.'라고 말을 하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의 고귀한 인성을 자신의 범죄로 모멸했다는 것을 사회가 간과하고 용서하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가 과하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권 등 기본권 등의 차원에서 볼 때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면 현대인의 호응을 얻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뉴스를 통해 16세에 결혼하여 2년 동안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구타와 학대에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쳤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두 귀와 코가 잘린 여성 아이샤가 성형 수술을 통해 새 삶을 되찾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구시대적인 신체 절단의 형벌이 현대에 곧 인권 유린과 직결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합당하고 공감이 가는 범위 내에서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처벌은 정당합니다.
그 사회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라는 전제하에서 그렇습니다.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5) - 절구 구(臼), 거듭 신(申), 보일 시(示), 귀신 신(神)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5) 
- 절구 구(臼), 거듭 신(申), 보일 시(示), 귀신 신(神)

" 많은 사람은 
뭔가 눈에 보여주고 이익을 안겨주는 
현실적인 신을 추구한다.
고대 중국인처럼!"

진시황(秦始皇) 시대의 소전(小篆)체를 보면 거듭 신(申)자가 절구(臼) 사이에 긴 막대기가 뚫고 지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네모난 상자를 긴 장대로 내리쳐서 부수고 있는 모양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절구가 아니라 양쪽 손이며 공손히 중간의 긴 막대기 같은 물건을 세로로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첨부 그림의 세 번째 소전체 참고)

그러나 더욱 오래된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의 거듭 신(申)자를 보면 또 그 모양이 판이합니다. 마치 사람 두 명이 다리를 엮고 누워있는 형상 같기도 하고 어머니 아래로 아기가 나오고 있는 출산의 형상 같기도 합니다. 그 출현 시기를 갑골문과 거의 같거나 조금 나중으로 보는 금문(金文)에서 거듭 신(申)자를 보면 그것은 우리나라 국기에서도 볼 수 있는 태극(太极)의 모양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 신(申)자의 조자(造字) 유래를 둘러싸고 정말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설문해자(说文解字)는 몸과 몸이 얽히고 묶여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럼 이것이 남녀의 성행위를 의미하는 것인가, 알몸으로 얽혀있는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가를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남녀가 아닌, 어머니와 딸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어머니가 딸을 출산하는 모양을 그려 문자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문화에서 거듭 신(申)자는 지지(地支)의 아홉 번 째(The ninth of the twelve Earth Branches) 글자입니다. 중국인들은 우주 만상을 크게 음(—)과 양(+)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목,화,토,금,수의 오행으로 나누어 이해했으며 그 음양오행을 다시 10개의 천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12개의 지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나누었습니다. 천간(天干)은 양(+)을, 지지(地支)는 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인들은 음과 양의 관계 가운데 우주 만물의 생명과 변화, 사멸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중국인의 사고의 큰 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거듭 신(申)자는 음력 7월을 뜻하며 음력 7월은 24절기의 15번째로 태양 황경이 165도가 되는 입추(入秋), 즉 백로(白露)가 있는 달입니다. 가을 분위기에 무르익어가며 농작물의 산출(產出)이 기대되는 수확(收穫)의 달입니다. 음(-)으로 음(-)을 낳는, 어머니가 딸을 낳아 무한한 생산을 기약하는 풍성한 달입니다.

갑골문과 금문, 소전체가 전해주는 의미를 연결하여 이야기를 구성해 보면: "음과 양의 조화 가운데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되는 시기가 되면 임산부의 기운, 즉 어머니의 기운인 음기(阴气)가 충만하게 되어 땅은 많은 경작물의 소출을 내게 되며 거둬들인 곡식을 절구에 넣고 찌어 껍질을 벗겨 모아 곧 다가올 겨우내 먹을 양식으로 비축한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소출과 출산의 의미가 있는 신(申)자는 고대 중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놀랍게도 귀신 신(神)자 안에 이 거듭 신(申)자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중국인은 거듭 신(申)자를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치는 번개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기도 했는데 하늘과 땅, 즉 양과 음의 작용을 소출과 출산의 의미와 연관 지었음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밭(田)을 가로질러 번개(I)가 수직으로 내리꽂는다는 것입니다. 번개는 비를 동반하게 마련이고 비는 농작물이 자라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귀신 신(神)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단순한 잡귀를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고, '만물을 생산한 신'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볼 때 지금 중국어 성경에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로 이 귀신 신(神)자를 써서 표현하는 것이 옥황상제에서 차용해온 것으로 보이는 상제(上帝)라는 단어에 비해 열등한 오용(誤用)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창조와 생산의 의미를 가진 거듭 신(申)자가 들어 있는 한, 또 설문해자의 귀신 신(神)에 대한 설명이 '생산자(조물주)'라고 명시된 이상, 귀신 신(神)자를 위대한 '창조신'으로 이해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봅니다.

귀신 신(神)자의 왼쪽(左邊旁)에 옷 의(衣)를 쓰기도 하지만, 원래는 보일 시(示)를 쓴 것입니다. 갑골문으로 보는 보일 시(示)는 죽은 자나 조상을 공양할 때 세워두던 높은 판자나 단(壇)의 모양처럼 보입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시(示)자의 머리 부분의 두 횡선은 하늘을, 밑으로 늘어진 세 선은 각각 태양, 달, 별을 의미한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하늘의 신(天神)이 땅으로 내려 와 땅의 신(地神)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즉 하늘 높이 있어 볼 수 없던 신이 땅에 강생(降生)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可視)적인 무엇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조물주 신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베풀어 주는 축복은 실제 산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옛날 중국인은 신(神)을 막연하게 우주 어딘가에 있는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나타나 보이는(示) 소출(申)을 통해 알 수 있는 만물의 생산자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혹자는 고대 원시인이나 의지력이 약한 사람들이나 신을 찾는다고 하지만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지능이 낮지 않았을 수도 있고 실제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우리의 능력 밖의 어떤 일을 바라며 초월적 존재가 실제로 눈에 보이도록 어떤 선물을 안겨주기를 고대하는 마음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신앙은 현실적입니다. 중국인에게 그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중국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고등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현실적인 욕구를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매우 많은 사람이 현실적인 요구를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고상한 내용은 그 이후의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뭐 번갯불이라도 번쩍 치고 빈손에 돈다발이라도 툭 떨어져야 믿겠습니까? 아니면 실제로 보이는 것(示)도 없고 생기는 것(申)도 없지만, 조물주가 있다는 것을 그냥 믿겠습니까? 아니면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신에 대한 개념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인생의 해답을 얻는 데 이용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신의 도움과 은총이 없이도 얼마든지 스스로 유에서 무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까? 결국, 결정권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물주 신을 기대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신으로 살든지!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6) - 늙을 노(老), 살필 고(考), 효도 효(孝), 가르칠 교(教)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 (6) 
- 늙을 노(老), 살필 고(考), 효도 효(孝), 가르칠 교(教)

" 어른의 바른 훈책 아래 자라지 못한 불효자인 나는
선생이 되었으나 스스로 가르침에 확신이 없어 이곳저곳 살피기만 할 뿐 
명확한 삶의 교훈을 전수하기 어렵다!"


원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늙을 노(老)자와 살필 고(考)자가 같은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중국인들은 이 두 글자를 혼용하였습니다. 그 뜻인즉슨, 머리가 긴(長)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림 참조) 공자께서 효경(孝經)에서 신체와 터럭과 살갗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身體髮膚受之父母) 당시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평생 자르지 않아 노년이 되면 긴 머리털을 치렁치렁 늘어트리게 되었습니다. 연장자(年長者)자 함은 나이뿐 아니라 머리털이 긴 사람을 뜻하는 것이죠.

늙을 노(老)자와 살필 고(考)자의 자원(字原)이 같다고 하여 둘의 의미를 연결해서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깊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설명하는 분의 설명도 들어본 기억이 납니다.

혹자는 옛날 중국인이 70세의 사람을 아주 연로(年老)한 노인으로 칭한 것을 두고 늙을 노(老)자의 윗부분이 머리가 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 7과 10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시황의 소전체(小篆體)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영락없이 긴 머리를 그려놓은 것처럼만 보입니다. 노인은 신체의 기능이 쇠하고 특히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가장 오래된 갑골문의 늙을 노(老)자를 보면 눈 한쪽 아래 구부정한 몸을 붙여놓은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지팡이를 덧붙이게 되는데 이때의 갑골문에 그려놓은 눈은 가운뎃점이 없어서 흐려진 시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중에 금문(金文)과 소전체로 넘어오면서 눈 모양은 사라지고 긴 머리 그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숫자 70이라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신체의 일부분, 눈과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효도 효(孝)자는 머리카락이 긴 노인을 의미하는 기호 아래에 지팡이 대신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지팡이가 아닌 어린아이가 연로한 사람을 부축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노인이 어린아이에게 업혀있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런 해설도 크게 그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면 글자 아래 그림을 어린아이보다는 아들이나 자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손자같은 아이에게 업어달라고 하는 노인은 없으니까요.
금문(金文)의 효도 효(孝)에서 보이는 아들 자(子)는 머리가 둥그렇게 크고 다리는 하나밖에 없는 모습인데 이는 아기의 다리가 천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아기를 강보(襁褓)에 싸면 아기의 다리는 안에 가려 보이지 않고 두 팔은 밖으로 나와 있게 됩니다. 어르신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고 큰 힘이 되지 않지만, 곁에서 재롱을 부리고 거동하시는데 다소 부축하게 해드리면 어르신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르칠 교(教)자의 왼쪽(左邊旁)에 효도 효(孝)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갑골문으로 보는 가르칠 교(教)자의 왼쪽 상단에는 머리가 긴 노인의 그림이 없고 오히려 가로 그을 효(爻)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효(爻)자는 '사귀다', '본받다'는 의미도 가진 글자인데, 어떤 분은 이것을 유학(儒學)의 삼경(三經)중에 하나인 역경(易經, 주역(周易))의 육효(六爻: 괘(卦)를 이룬 가로획)와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또 어떻게 보면 이 글자는 '날카로운 칼 따위로 벤다'는 의미의 예(乂)자를 위 아래 거듭 적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역경의 효를 뜻한다면 그 아래 아동은 역경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만약 날카로운 농기구나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면 어린아이는 농사 방법이나 사냥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가르칠 교(教)의 왼쪽 상단 부분은 원래 노인을 의미하지 않았고 나중에 효도 효(孝)자와 같게 바뀌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분명히 어린 학생의 '교과서' 혹은 '배울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어서 가르칠 교(教)자의 오른쪽 부분을 보니 칠 복(攴)입니다. 손으로 막대기 같은 것을 쥐고 가볍게 때리는 모양입니다. 아마 공부를 하는 아이를 곁에 두고 열중하지 않거나 졸면 회초리를 때리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도록 회초리를 드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습관입니다. 현대에 와서 부모의 과도한 체벌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제가 세 자녀를 키워보니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그것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자녀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차원에서 다소의 체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을 적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봅니다. 더 길어야 할 머리카락이 짧다 못해 성기고 백발도 듬성듬성 나 있어 볼품이 없습니다. 분주하게 일하기도 바쁜 젊은 사람이 벌써 노년기에 접어 든 것처럼 이유없이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돌아보니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했다는 것과 자식 낳아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30세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무거운 가장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시고 집을 떠나 본인의 길을 걸어가셨던 어머니지만 그 곁에 손자 손녀 놓아드려 부축 한 번 해드리지 못했습니다(不孝). 또한, 곁에서 따끔한 채찍질(攴)이 없다고 방종하여 더욱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지 않았고 이젠 어설픈 실력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教) 소란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효(不孝)한 자로 누군가를 가르칠(教) 자신감도 없는 저는 흐르는 시간 가운데 늙어가는(老) 거울 속의 자신을 느끼며 이곳저곳 하릴없이 눈치만 보면서(考)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