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송봉운의 한자 이야기(9) - 복 복(福), 간직할 부(福)

: 신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든 경건하고 여유로운 모습이 복(福)이다.

최근 한 개신교인이 한자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기를 복 복(福) 하늘(一)로부터 삼위일체(川)가 내리신 것이 복이며 사람의 입(一口)이 먹을 것으로 흡족하게 채워지며 에덴동산(田)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을 내린 한국인이나 중국인 개신교인들 스스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았던 시기에 창세기 내용을 한문으로 풀이한 것"이라고 이러한 해석이 시대적으로 엉터리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격다짐으로 한자의 창시자가 이미 고대로부터 전래된 창세기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하더군요. 확실한 근거도 없음에도 개신교적인 강론이나 주장에 이런 '미신적인 해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개신교가 "꿩 잡는 게 매다"식의 목적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복 복(福)자가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역시 갑골문(甲骨文)입니다. 갑골문의 글자 모양을 보면 금방 그것이 다신(多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손에 든 잔(盞)을 묘사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술을 바치면서 자신에게 풍족함과 평안함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모습에서 이 글자가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 글자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상이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삼위일체 개념이 상당히 후대(325~451년)에 정립된 것이라고 볼 때, 고대에 만들어진 글자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들어있다니, 역사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금문(金文)》에 와서 복(福)의 모양은 왼쪽에 제사를 의미하는 볼 시(示)와 오른쪽에 술병(酉 닭 유, 술을 담는 그릇을 뜻하기도 함)을 묘사한 모양이 뚜렷해집니다. 술잔 혹은 술병을 든 두 손은 보이지 않습니다.

《설문해자(说文解字)》도 갑골문으로부터의 이 전통을 따라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받는 복(福)을 '신의 돌보심'이라고 해설하는 것을 볼 때, 이 글자가 종교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등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자에서 나타나는 '제사를 드린 대가로 받는 것이 복이다'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뒤집어서, '대가를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보다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나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입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이 최소한 엉터리로 한자의 유래를 꿰맞추어 삼위일체 교리가 확실하고 대단한 교리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다신에게 술을 바친 것, 그것도 좋은 술을 바친 것은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그 복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좋은 술을 빚어 신에게 바쳤다면 그것이야말로 절실한 기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자의 기도든, 절박한 빈자(貧者)의 기도이든지 두 손을 공손히 바쳐 올려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경건하게 보입니다. 넉넉한 형편에 있음에도 겸손하게 기도를 올립니다. 절박한 상황이지만 신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옷깃을 여민채 술을 올립니다. 저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알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에서 부자들의 기도는 신 앞에서조차 다소 거만한 듯 보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 찌든 가난을 이유로 기본적인 위신도 챙기지 못한 채 잠시 기도할 여유조차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복은 과연 신이 우리에게 치하(賜下)하는 것 맞습니까? 아니면 부자가 겸손하게 두 손을 반듯이 올리고 하는 경건한 기도와 빈자가 바쁘고 쪼들린 삶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추어 드리는 예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삶의 여유와 쉼' 자체는 아닐까요? 복을 갖춤(備)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이 혹시 '마음 갖춤' 혹은 '마음가짐'의 뜻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기도하는 그 마음이 복(福)을 가져다준다. 아니,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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